몰려오는 피란민에 인구 50만 명 급증했던 당시 상황
여전히 남아있는 전쟁 당시 삶의 현장... 관광명소로도 잘 알려져
[문화뉴스 MHN 김민송 기자] 올해로 6.25전쟁 69주년을 맞이했다. 6.25전쟁과 부산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닌다.
전쟁이 끝난 뒤 1955년의 공식 통계를 살펴보면 당시 부산 인구는 104만 9천 명이다. 전쟁 전의 부산 인구가 약 50만 명이었으니 순식간에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한순간에 50만 명의 인구가 들어선 부산은 기존 도시구조로는 그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후 부산은 기형적으로 팽창하게 된다.
계속 지어지는 판잣집들도 자리가 부족하여 산에서 또 산으로 올라갔다. 자리가 없어 무덤 위에도 집을 지은 것은 물론 무덤 비석을 벽 대신 삼기도 했다.
높은 곳에 계속 집들이 생겨남에 따라 산복 도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이때 언덕을 잇는 가파른 계단도 만들어졌다.
6.25전쟁의 아픈 역사와 피란민들의 힘겨웠던 삶은 부산 원도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부산은 6.25전쟁 발발 후 1023일 동안 임시수도로 지정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부산으로 향했고, 현 동아대 석당박물관이 임시중앙청사 역할을 했다.
임시중앙청사를 중심으로 경무대(현 임시수도기념관), 국립중앙관상대(현 부산기상관측소), 미국대사관 미국공보원(현 부산근대역사관) 등이 자리했다. 부산시는 이 건물들과 유엔묘지(현 유엔공원) 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깡통시장, 국제시장, 보수동 책방 골목 등 관광명소로 잘 알려진 곳들도 6.25 전쟁 당시 만들어졌다.
부산의 40계단은 피란민들에게 만남의 광장이었다. 어지러운 전쟁 상황 속 가족도 챙기지 못하고 부산으로 건너온 피란민들은 집은커녕 의자 하나 없어 계단에 앉아야 했다. 그 후 그곳은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어 사람을 찾는 이가 있으면 40계단에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 40계단의 풍경은 조형물로 재현되어 문화테마거리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감천문화마을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만든 대표적인 피란민촌이다.
지금은 부산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한 해 방문객 수가 200만 명이 넘는 '부산의 산토리니'가 되었다.
근처에 있는 서구 아미동 비석 마을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비석들이 피란민들의 삶이 터전이 된 곳이다. 피란민들이 일본인 묘지 위에 집을 지어 형성되었다.
이러한 피란민의 역사를 담고 있는 부산시는 매년 피란수도 부산을 알리는 '피란수도 부산 문화재 야행' 축제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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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9주년, 피란수도 부산을 돌아보며
몰려오는 피란민에 인구 50만 명 급증했던 당시 상황
여전히 남아있는 전쟁 당시 삶의 현장... 관광명소로도 잘 알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