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도 제철이 있다면

intro.

읽고 쓰고 걷는 삶을 살고자 한다. 흔한 일상에서도 기어코 신나는 일을 찾아낸다. 맛있는 것은 나눠 먹어야 하고, 재미난 일은 같이 해야 한다. 봄마다 동무들을 다 데리고 고사리를 꺾으러 가는 바로 그 마음으로 쓴다. 세상 아무도 못 말리는 서평가 김윤정의 명랑한 독서 이야기. '김윤정의 고사리원정대' 그 첫 번째는 임택 작가의 <동키 호택> (책이라는신화)이다.

동키 호택
동키 호택

 

제주를 떠나온 지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이렇게 말하면 제주가 고향이거나 굉장히 오래 제주에 살았던 사람처럼 들린다. 제주에는 고작 2년 살았을 뿐인데, 나는 늘 제주 앓이를 한다. 특히 매년 봄에는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 막 피어난 벚꽃을 보며 사람들이 벚꽃놀이에 한창일 때 나는 제주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눈을 감으면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드는 고사리가 아른거린다. 마음에 바람이 분다. 

어린애 손을 고사리 같은 손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고사리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아이가 주먹을 쥔 듯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피지 않은 주먹 쥔 고사리가 나물로 먹을 수 있는 고사리다. 손가락을 활짝 펴듯이 잎이 벌어진 고사리는 먹지는 못하지만 바람에 몸을 맡겨 손을 흔들어 곁에 고사리가 있다고 알려준다. 못 먹어도 고!사리다. 

4월 중순쯤 제주에 비가 내리기를, 나는 서울에서 기다린다. 연이어 며칠 내리는 비를 맞으면 고사리가 쑥 자라 나온다고 해서 제주 사람들은 이때를 '고사리장마'라고 한다. 고사리장마가 끝나면 장화와 챙이 넓은 모자, 고사리 앞치마, 토시, 장갑을 배낭에 챙겨 넣는다. 선글라스와 호루라기는 필수다. 새벽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가시덤불과 마른풀 속에 고개를 숙인 아기 주먹 같은 고사리를 찾아낸다. 풀 뜯는 소와 말을 만나고, 소똥ㆍ말똥ㆍ제비꽃을 지나면 어느새 앞치마가 부풀어 오른다. 

 

“갑자기 욕심이 났다. 나는 버려진 신발들 중 깨끗해 보이는 신발 몇 개를 골라 호택이가 가지고 있는 가방에 쑤셔 넣었다. 나는 방금 한 말도 잊은 채 욕심을 쓸어담았다. 가방이 욕심으로 부풀어 올랐다. ‘뭐 욕심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지. 인생은 의욕으로 사는 거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당나귀와 함께 걸어간 한국판 돈키호테, 임택의 여행기 <동키 호택>의 한 구절이다. 여행기를 동화로 써 보고 싶었던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당나귀를 생각해 냈고, 당나귀와 여행을 떠나게 된다. 임택 작가는 마을버스로 세계여행을 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마을버스에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는 평범하지 않은 여행에 그는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을까. 그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꼭 그렇게까지 유난을 떨어야 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제주로 고사리를 꺾으러 그것도 당일치기로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라리 그 돈으로 고사리를 사 먹지 그래?”라고 말한다. 값으로 따진다면야 사 먹는 것이 훨씬 싸게 들 수도 있지만 제주로 떠나는 고사리 소풍의 매력은 따로 있다. 훌쩍 날아 새로운 공간에 발을 디디고 내 손으로 직접 고사리를 꺾는 그 손맛,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먹는 김밥의 환상적인 맛, 구슬땀을 식혀 주는 상쾌한 바람과 멀리 보이는 한라산 그리고 고사리를 가져와서 함께 나눠 먹는 기쁨, 스무 가지도 더 열거할 수 있다. 맛있는 것은 꼭 나눠 먹고, 재미있는 일은 꼭 같이하고 싶은 야무진 욕망이 봄마다 고사리 원정대를 모집하는 이유다. 

임택이 말하는 의욕은 의미 있는 욕심이다. 꼭 나만을 위해 무엇을 탐하거나 바라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특히 행복한 건 누군가와 함께 나눠 갖기를 원하는 마음, 그 이타적인 마음도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이로운 마음이지만 조심해야 하는 점도 물론 있다. 온 제주 널린 게 고사리이나,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개인 소유의 목장이나 국립공원의 고사리는 함부로 채취하면 안 된다. 내 것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것도 소중하다는 것을 고사리를 꺾으며 배운다.

임택 작가는 호택이라고 이름 붙인 당나귀를 처음에는 그저 짐꾼으로 생각했지만, 825㎞의 산티아고 길을 순례하며 온기를 나누는 길동무가 되고 서로를 위해 마음을 쓰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호택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모아왔다. 임택 작가는 여행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생과 닮았다고 말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된 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면 그 나름으로 완벽한 여행이 되겠지만, 더러 몇 가지는 변수가 생기고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도 재미있는 것이 여행이고, 인생이다. 

여행도 인생도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이를테면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다음 달에 가자'라거나 '내년에 가자' 하고 다음으로 미룬다면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유보하는 것과 같다. 지금 떠나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듯이 인생도 그렇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다. 

고사리는 4월이 제철이다. 행복에도 제철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길을 걷는 이유다. 행복할 거리를 가득 담은 불룩한 고사리 가방을 메고 오늘도 나는 씩씩하게 걷는다.

 

 

북칼럼니스트 김윤정
북칼럼니스트 김윤정

 

[문화뉴스 김윤정 ]

문화뉴스 / 김윤정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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