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06.21
캐스팅: 이승주, 전무송, 전수경, 손숙, 김재건, 정동환, 길해연, 손봉숙, 남명렬, 정경순, 박윤희, 김명기, 양승리, 이호철, 루나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좌석: 10열 중앙

“이것은 나의 무대, 나의 연극”

[문화뉴스 강시언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햄릿’을 잘 모르더라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문장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고전은 그렇다.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제목을 들으면 그 작품에 나오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장면쯤은 자연히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보통 작품의 주제를 꿰뚫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사느냐, 죽느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은 ‘햄릿’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일반적으로 삶이라는 것은 축복과 환희, 죽음이라는 것은 절망과 고통으로 표현된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삶은 곧 선이요, 죽음은 곧 악이다. 우리는 모두 은연중에 이 명제를 참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햄릿은 굳어질 대로 굳어진 이 단단한 고정관념의 벽을 과감히 깨뜨리며 벽 너머의 사람들에게 묻는다. 삶이 그 자체로 축복이라면, 지금 나의 삶도 축복입니까? 비뚜름한 시선으로 물음을 던지는 그에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삶은 온통 저주로 가득했으니.

연극 ‘햄릿’의 이야기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원작 소설과 동일하게 흘러간다. 햄릿은 부왕인 아버지를 잃고, 이내 왕위에 오른 숙부와 어머니가 재혼하는 것을 보며 경멸을 금치 못한다. 그러다 숙부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은 미친 척 연기를 하며 몰래 복수를 준비한다. 하지만 숙부를 살해하려던 그의 계획과는 달리 연인 오필리어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게 되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까지 영영 잃고 만다. 햄릿의 손에 가족을 모두 잃은 레어티즈는 그와 검술 시합을 벌여 복수를 하려 하고, 음모와 계략으로 가득 찬 결투가 펼쳐지게 되는데…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햄릿’, 삶이라는 이름의 비극을 논하다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쓰인 작품인 ‘햄릿’은 그 명성에 걸맞게 끔찍하게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낳는 지독한 인과응보의 연결고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들의 세상에도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할까’하는 의문까지 절로 들게 만든다. 죽음은 복수가 되고 복수는 죽음이 된다. 화해와 자비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완벽한 비극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 같은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보는 듯하다. ‘비극’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하면 딱 이 작품이지 않을까. ‘비극의 바이블’이라는 칭호가 전혀 과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다. 

연극 ‘햄릿’의 이야기는 외적으로는 죽음과 복수, 음모와 계략이 바탕이 되어 흘러간다. 인물들의 감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고, 복수의 칼날을 갈며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주요 내용이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주인공 햄릿의 고뇌와 혼란, 갈등이 주요하게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질문처럼 한 인간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가는, 어떻게 보면 보통의 성장스토리와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햄릿’의 구성에 있어 외적인 부분, 내적인 부분 다 필수적인 요소이나 작품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햄릿의 내면에 있다. 그가 절망적인 삶을 살면서 겪은 삶의 모습, 그리고 죽음의 모습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를 넘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잃고 복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빈껍데기 같은 햄릿의 모습이 무덤 속에 궁 굴러다니는 해골과 무엇이 다르랴. 단순히 살아 숨 쉰다는 것만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논할 수 있는가. 스스로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때, 그곳에 사랑과 행복이 있을 때 비로소 산다,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햄릿’, 삶이라는 이름의 비극을 논하다

운명의 잔혹한 심판대에 놓인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작고 연약한가. 삶은 원하는 방향대로 흐르지 않는다. 상실과 혼돈, 절망과 분노는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인생을 헤집어 놓는다. 반면 죽음은 어떠한가? 그것은 나의 선택에 달렸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죽음에 이르게 할지 모두 내가 정할 수 있다.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삶과 단단히 쥐어진 칼자루마냥 박혀있는 죽음.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드는 삶과 죽음의 농간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여기서 햄릿은 선택한 것이다. 삶의 노예가 되느니 죽음의 주인이 되겠노라, 하고.

연극 ’햄릿‘은 고전적이고 철학적인 동시에 신선하고 창의적이다. 이것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나 싶지만 햄릿의 무대에서는 가능하다. 고전적 이야기와 구조, 명작이 가진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출과 사운드, 가득 채운 예술적인 색채로 새로운 ’햄릿‘의 세계를 창조한다. 예술가의 붓끝에서 창조된 듯 유연하고 자유로운 ’햄릿‘의 먹색 움직임은 영원히 녹슬지 않는 고전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햄릿’, 삶이라는 이름의 비극을 논하다

연극 ’햄릿‘의 미학은 신, 구 배우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파격적인 캐스팅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무대 위, 줄지어 늘어선 의자에 걸터앉은 배우들의 면모를 보고 있자면 감히 대한민국 연극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연극’, 그 자체의 모든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들의 모습에 가슴 한켠이 찡하고 울리는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오랜 시간 연극의 가치를 지켜온 원로 배우들과 새로운 연극의 시대를 열어갈 신세대 배우들이 만나 펼치는 열정적 무대는 예술, 그 영원히 쇠락하지 않을 위대한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연극 ‘햄릿’의 무대는 절제된 합리주의적 미학을 표방하는 듯 간결하고 신화적이다. 특히 무대 뒷면을 메운 거울의 형상은 인물들의 추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내며 인간의 죄악을 공개 심판하는 듯한 위압감을 선사한다. 어두운 조도와 혼탁한 연기는 극에 긴장감과 신비성을 더하며, 백색의 스포트라이트는 주체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다. 통일성과 상징성을 적절히 담은 흑백의 의상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소품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동선이 복잡한 편이기에 이렇듯 절제미를 살린 연출이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햄릿’, 삶이라는 이름의 비극을 논하다

연극 ‘햄릿’은 강렬하고 비극적이다.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대전제 앞에 처절히 무릎 꿇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잔인하게 현실적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문제다. 그러나 부디 그 문제의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행복한 기대는 말기를.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그대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니 말이다. 고전이 선사하는 묵직한 절망의 울림을 목도하고 싶다면 오는 9월 1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햄릿’의 여정에 함께 해보기를 권한다. 인간 실존의 철학적 근본을 찾는 비극적 여정이 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다. 

문화뉴스 / 강시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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