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06.27
캐스팅: 신재범, 홍지희, 최호중 그리고 화분
장소: 예스24 스테이지 1관
좌석: I열 중앙

"괜찮을까요?"
"어쩌면요."

[문화뉴스 강시언 ]  빛바랜 나무 벽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아파트. 우편 배달부만 간간히 드나드는 이 적막한 건물은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헬퍼봇들의 보금자리다. 그중에서도 신식 로봇에게 밀려 은퇴한 구버전 헬퍼봇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는 끝을 기다리는 로봇들의 공허한 일상만이 가득하다. 이른 아침 기상 예보를 시작으로 바삐 흘러가는 '올리버'의 방, 528호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오늘 날씨를 듣고, 밝은 햇살을 가득 머금은 화분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우편 배달부를 맞이하고 재즈 레코드를 듣거나 책을 읽는다. 그날도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하루였다. 예상치 못한 노크 소리가 방문을 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 매일 똑같은 방 안 풍경... 아파트 531호에 사는 헬퍼봇 '클레어'는 평소와 같이 삐걱대는 팔 관절을 돌려대며 벽에 달린 충전기에 본체를 연결한다. 어라,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착 달라붙어야 할 충전기가 힘없이 고꾸라진다. 충전기까지 말썽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람. 클레어는 온갖 공구를 주워 들고 수리를 시도하지만 턱도 없는 노릇이다.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봐도 다들 오늘은 힘들다며 고개를 젓는다. 클레어는 결국 집을 나서 이웃집들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이 낡아빠진 아파트의 고물 주민들은 도통 도와주러 나와보질 않는다. 배터리가 거의 끝을 보이던 차, 마지막 희망을 갖고 찾아간 528호에서 올리버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올리버는 클레어의 충전을 도와주고,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그러던 중 올리버가 옛 주인, 제임스를 찾으러 제주도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게 된 클레어는 자신도 제주도에만 산다는 반딧불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며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둘은 반딧불이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 숲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처음 느껴보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사랑, 그 간질간질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 올리버와 클레어는 서로에게 마음을 고백하며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점점 낡아가는 부품들과 여기저기 삐걱대는 몸은 이들의 시계가 멈출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경고하는데... 올리버와 클레어, 두 헬퍼봇의 사랑은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끝까지 끝은 아닌 우리의 영원한 해피엔딩

어릴 적, 학기마다 열렸던 과학경진대회의 단골 소재는 '로봇'이었다. 그중에서도 '과학이 발달한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세요'와 같은 주제가 나왔다 하면 곱게 앞치마를 두른 로봇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그린 아이들이 학급에 두어 명씩은 꼭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아이에서 성인이 된 지금 우리들도 로봇을 그저 인간의 일을 덜어주는 존재, 과학 발전의 산물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쩌면 해피엔딩'에 등장하는 로봇, 헬퍼봇들은 다르다. 이들에게는 감정이 있고, 삶이 있으며 죽음도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머릿속, 아니 메모리 속에 소중한 추억을 담기도 한다. 너무도 인간 같은, 어쩌면 인간보다도 더 인간 같은 로봇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경하고 신기하면서도 어딘가 뭉클한 기분이 든다.

사랑은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을 위해 정해진 임무를 일정하게 수행해야 하는 로봇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물론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말이다. 인간은 로봇에게 '사랑'을 허용하지 않았고, 헬퍼봇들이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올리버와 클레어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올리버와 클레어는 꼭꼭 숨겨져 있던 사랑을 알아채고, 깨닫고, 느끼고, 받아들인다. 사랑이란 그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불쑥 찾아오고 시작되며 물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마치 예정에 없던 어느 오후의 노크 소리처럼. 

올리버와 클레어가 함께 하는 시간들은 여느 풋풋한 연인들의 모습처럼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다. 쳇바퀴 굴러가듯 무료한 하루하루들이 흘러가던 이들의 방 안은 예상치 못한 설렘과 즐거운 웃음소리들로 가득 찬다. 매일 똑같은 햇살도 함께 맞는 아침이면 더 따스하게 느껴지고, 서로에게 늘어놓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진진하다. 일상은 변하고, 어느새 올리버와 클레어는 서로의 일부가 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이들의 행복은 곧 어떤 불안에 사로잡힌다. 언젠가 다가올 이 사랑의 끝, 이 사랑의 결말. 세상에 영원이란 건 없어, 인간들의 사랑을 지켜보며 클레어가 깨달은 그 진실은 잔인한 현실이 되어 찾아온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이야기는 어떤 엔딩을 맞게 될까? 그것은 어쩌면, 해피엔딩. 이야기의 끝은 그 시작만큼이나 중요하다. 특히 관객들에게 작품의 감동과 여운을 전달하는 데에 결말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엔딩은 여태껏 보아온 그 어느 뮤지컬의 결말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제목에서부터 이야기의 끝을 강조하는 것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감히 이보다 더 완벽한 결말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엔딩을 곱씹는 것만으로 눈물이 핑 도는 동시에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오른다. 이 무슨 해괴한 감상인가 싶을지 모르지만 작품을 보고 나면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말이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재즈풍의 빈티지한 멜로디와 감성적인 넘버들을 주축으로 사랑의 기쁨과 슬픔, 시작과 끝을 노래한다. 특히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재즈 선율은 작품에 확실한 포인트가 되어준다. 로봇과 재즈. 이렇게만 들으면 조금은 언발란스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은퇴해서 낡아가는 헬퍼봇의 처지와 빛바랜 듯한 오래된 재즈 음악은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마치 다락방 한구석에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CD를 하나 꺼내 들듯, 아련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픈 멜로디가 잔잔히 무대를 채운다. 한때 사람들의 곁에서 활기차게 일하고 움직이며 시간을 보냈던 과거 어느 날의 추억처럼. 

무대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올리버의 방이다. 고동색 나무로 만들어진 벽과 낡은 레코드플레이어, 잔뜩 쌓인 책과 LP판...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듯 고전적인 방 안 풍경 속에 또랑또랑한 기상 예보가 울려 퍼지는 디지털 스크린과 충전기, 각종 전자 공구들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방을 비롯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무대 배경은 기발한 상상력과 섬세한 소품과 장치들, 아름다운 풍경들로 가득 채워진다. 특히 시즌을 거듭할수록 디테일이 살아나는 소품들과 환상적인 스크린 이미지는 시각적 즐거움을 톡톡히 선사한다. 전체적인 무대 구성, 의상 디자인과 장치 활용까지 볼거리가 가득한 작품이므로 감각적인 무대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끝까지 끝은 아닌 우리의 영원한 해피엔딩

'로봇'이 된 배우들의 귀여운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어쩌면 해피엔딩'만이 가진 특별한 요소 중 하나다. 뻣뻣하게 굳은 관절, 시리나 빅스비처럼 영혼이 2% 부족한 기계적인 목소리를 프로페셔널하게, 또 유쾌하게 소화하는 배우들의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냥 즐겁다. 신재범, 홍지희 배우는 인간적인 로봇의 형태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며 기계적인 행동과 말투, 인간적인 감정 표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신재범 배우의 따뜻하고 안정적인 목소리와 홍지희 배우의 또랑또랑하고 밝은 목소리가 합쳐진 아름다운 듀엣에 절로 빠져드는 데에 이어 올리버와 클레어를 집어삼킨 듯한 놀라운 캐릭터 싱크로율에도 절로 감탄이 새어 나온다. 최호중 배우의 다채로운 연기도 작품에 생동감을 더하며 매력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사랑에 영원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이나 로봇이나 시간이 흐르면 낡고 변하는데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제목으로 그 답을 대신한다. "어쩌면요." 우리는 모두 우리 사랑의 엔딩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이란 생각보다 더 벅찬 기쁨이며 생각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행복의 종착지이기 때문이리라. 로봇들이 선사하는 순수한 사랑 이야기,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오는 9월 8일까지 예스24 스테이지 1관에서 공연된다. 어쩌면 해피엔딩일지 모를 이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공연을 보며 직접 확인해 보기를 권한다. 

 

문화뉴스 / 강시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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